"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책은 읽다




4월 초에 풀린 올재클래식스 2차분에 포함되어 있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었다. 이번에 풀린 2차분 4권은 차례로 <한글맹자>, <소크라테스의 변명 외>, <유토피아>, <청성잡기>인데, 그 중에 제일 쉬워 보이는 <유토피아>를 먼저 읽었다. 올재클래식스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따로 포스팅할 생각인데, 커버가 좀 못났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 가격(2,900원)에 이런 양질의 책을 만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내가 고전을 자발적으로 사서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홍정욱 사장님 만세! 7막 7장 만세!

원본은 라틴어인데, 내가 읽은 한글판은 주요섭 선생의 영문 번역판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그 주요섭 선생이 맞다(알고보니 현 코리아헤럴드의 전신인 코리안리퍼블릭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다는군). 문체나 어투에서 오래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책은 술술 잘 읽힌다. 왠지 번역에 격동기를 살아간 계몽 지식인의 생각이 들어있다는 느낌이다.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야 널리 잘 알려져 있는데, 2012년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한물 간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사유재산의 금지와 공동 소유. 이런 공동체 실험은 1991년 12월 25일 이후로 이미 부정당하지 않았나? 물론 1534년 7월 7일에 목이 잘린 토머스 모어로써는 공산주의의 몰락을 알 터가 없었을테지만 말이다. 또한 참으로 재미가 없는 나라라는 생각도 들었음.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여행 해봤자 모든 도시가 같고 도박도 못하고. 모든 도시의 모습이 비슷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결혼의 여부가 옷에 드러나는 곳, 사생활과 비밀이 없다는 점에서는 <1984>에서의 전체주의를 떠올리게도 했다. 물론 그 곳보다는 훨씬 밝지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라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 자체가 너무 이상적이었다. 외침을 당하지 않고 자연재해가 없는 섬이라는 것부터 그렇다. 모두가 똑똑하고 잉여재산이 남으며 끝없는 부가 충족된다는 이야기에서는 스타크래프트의 무한맵이 떠올랐음. 생각해보면 무한맵은 자원이 많으니깐 서로 싸울 필요가 없잖아? 전체적으로 정말 이상적인,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이 시대때 벌써 이런 생각을!'하고 놀라게 되는 구절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도 유효하고 언제나 읽는 사람에게 신선함을 전해주는 것이 고전이라면, 유토피아는 그 고전에 속할 가치가 충분했다. 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구절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환자 곁에서 말동무해주고, 그 밖에도 환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다 써봅니다. 그렇지만 불치병일 뿐 아니라 잠시도 간격을 두지 않고 계속 고통을 느끼는 환자가 있는 경우에는 신부들과 공무원들이 찾아가서, 그토록 아픈 병을 더 조장해 더 고생할 필요 없이 목숨을 끊어 아픔을 영원히 잊어버릴 결심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병이 나을 가망이 전혀 없는 만큼 살대로 다 산 그런 환자는 삶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어, 자기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공연한 짐만 되고 있으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p. 135)

이 부분인데, 의학계에서 극히 최근에야 떠오르고 있는 호스피스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불치병, 말기 암 환자들의 생사 결정 문제에 대해 강박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은가?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환자들을 살려두는 이유와 토머스 모어가 환자들을 목숨을 끊는 이유가 둘 다 종교적이라는 이유이다. 삶의 중요성과 자살의 부정, 희망에 대한 끈을 놓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살려놓는 우리나라와 달리 토머스 모어는 내세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불치병 환자들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 외에도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 사람들의 도덕적 관념의 기저에 '착한 일 하면 천국가고 나쁜 일 하면 지옥간다'는 내세론을 깔고 있는데, 내세에 대한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이 순간적 쾌락만 좇아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무교에 실존주의자에 가까운 나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토머스 모어는 내세만을 꿈꾸는 금욕주의자보다는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해준다. 16세기에 이런 생각을 했다니, 우와, 이 남자 같이 맥주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좋을 진짜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목이 잘렸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다.

거의 읽지 않는 사회 고전을 읽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상적인 나라를 설계하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문명'이 떠올랐다. 토머스 모어가 시드 마이어의 '문명'을 해봤다면 책 내용이 좀 달라졌을까? 아 '문명' 하고싶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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