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잼을 보다Pearl Jam at Etihad Stadium(1) - 0910 with guitar


부제 : 나는 어떻게 잠과 피로와 싸웠는가 

 세계 곳곳의 음악 페스티벌을 찾고 공연을 보겠다는 거창한 테마를 잡고 집을 떠나온 지도 근 한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일을 구했다. 처음 2주 간은 정말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미친 사장이 처음 10일동안 휴일을 주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손가락도 꿈쩍 못하고 쓰러지곤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11월 20일만 기다렸다. 외국에서 보는 첫번째 공연인 펄 잼Pearl Jam의 멜번 콘서트가 있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실 펄 잼은 내 세대와는 별 연관이 없는 밴드이다. 시애틀에서 목에 가래가 낀 남자들이 우루루 몰려나와서 그런지(아니, 이 장르명은 정말로 잘 지은 것 같다니까!)라는 음악을 할 때 나는 겨우 걸음마를 떼고 있었고, 심지어 커트 코베인이 자살할 때 나는 햇병아리 유치원 달님반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펄 잼의 곡을 들은 것은 1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때의 무렵이었는데, 그것 마저 자우림의 리메이크 버전 'even flow'였기 때문에 나는 그런지는 이렇게 가녀리고 느릿느릿한 음악을 하는 장르인 줄 알았다.

 그 후 듣게된 원곡은 리메이크 버전과는 너무나 달라 충격을 받았다.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찾을 수 없던 야성적 본능, 땀 냄새, 속도감과 박력이 살아 있었다. 아, 땀내 나는 남자들이 걸걸한 목소리로 하는 음악, 이게 그런지구나! 물론 나중에서야 홀Hole이라는 여자 보컬이 있는 밴드도 그런지고 땀냄새가 꼭 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펄 잼의 even flow가 그런지 하면 떠오르는 상징 비슷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멜번에서 펄 잼의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티켓을 사 버렸다. 가격이 쎄긴 하지만 자주 보기 힘든 아티스트고 서포트 밴드도 괜찮은 것 같고(벤 하퍼Ben Harper & Relentless 7와 리암 핀Liam Finn이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가 보게 되는 스타디움 콘서트라서 우선 무작정 지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기에 가장 싼 3층 좌석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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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는 흐릿하고 후덥지끈 하더니 도심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서둘러 에티하드 스타디움Etihad Stadium으로 가는데, 걱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아니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어떻게 세 네시간 공연을 보지? 비라도 쫄싹 맞아서 감기 걸리면 안되는데. 내일 일 못 하는거 아냐?

 멜번의 명물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가서 보니 돔 스타디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스타디움으로 입장했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이미 스타디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바깥 날씨에 사람들의 열기까지 더해져서 스타디움은 안은 후덥지끈했다. 넓은 스타디움 여러 곳에서 맥주와 굿즈를 팔고 있었고, 천장에 달려 있는 TV에서는 맞추면 티셔츠를 경품으로 주는 펄 잼 퀴즈가 나오고 있었다. "퀴즈: 펄 잼이 93년 낸 앨범 'Vs.'의 첫번째 싱글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 1.Animal 2.Go 3.Rats 4.Even flow". Animal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을 모르겠어서 그냥 자리를 나와버리고 말았다.

Liam Finn & Eliza-Jane Barnes


  5시가 살짝 넘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서포트 밴드인 리암 핀Liam Finn의 공연이 이미 시작된 후였다. VB를 한 컵 사서 마시며 여행 중 첫번째 공연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리암 핀Liam finn은 뉴질랜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다. 핀finn하면 Split Enz와 Crowded House를 이끈 뉴질랜드의 그 유명한 핀 브라더스Finn brothers를 빼놓을 수 없는데, 역시나 리암 핀은 앞서 말한 닐 핀Neil Finn의 장남이다. "꼭 들어야 할 뉴질랜드 앨범 100장"에서는

 "리암 핀은 어렸을 때 부터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악기를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고 나와있다. 피는 속일 수 없는 거다.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뮤지션이 된 그는 2007년에 데뷔 앨범 "I'll be lightning"을 낸다.


 처음으로 가지고 온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위와 같은 결과물만 나올 뿐이었다. 원래도 사진에 관심이 없고 노출과 조리개에 대한 지식도 없는 터라 결국 몇장 찍어보려 애쓰다 포기하고 공연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버지와 삼촌 보다는 좀 덜 다듬어진 듯한 느낌이 나긴 하지만, 그는 정말로 멋진 인디-드림 팝을 들려 주었다. 루프 스테이션 등의 장치를 이용해서 레이어를 하나씩 쌓아나가고, 그 사이에 자기는 기타에서 드럼으로 요리조리 옮겨 다니면서 연주를 계속 하는데 사운드에 빈틈이 없었다. 하도 혼자 북치고 기타치고 하길래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Eliza-Jane Barnes라는 여성과 듀엣으로 그 모든 사운드를 다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운드에 별 빈틈이 없다. 모든 악기를 다루는 퍼포먼스가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다. 나에게는 그 후에 본 메인 공연 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리암 핀의 Jools Holland 라이브>


 스타디움 1층에서 리암 핀의 공연이 끝나는 것을 보고 내 좌석이 있는 3층으로 올라왔다. 스타디움이 정말로 커서 걸어서 올라오는 데만 해도 꽤나 걸렸다. 복도 여기저기에는 이 곳에서 공연을 치뤘던 유명 인사들의 사진과 연도가 걸려 있다. 본 조비도, 그린데이도 여기서 공연을 했었다.

 마침내 3층에 올라와 표를 내고 입장한 본 스타디움은 촌놈한테는 신천지...


 멜번 에티하드 스타디움Etihad Stadium의 전경. 마땅한 편집도구가 없어서 파노라마처럼 멋있게 잇지 못하고 4개를 주욱 이어붙여 올렸다 -_-;; 멜번에서 가장 큰 돔 스타디움인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는 평소에는 럭비나 크리켓, 호주식 풋볼 등 호주인들에게 대중적인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호주 친구들이 좀 특이한 스포츠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하자. 상암 구장은 커녕 대전 한화 야구장도 놀라웠던 나에게 이곳은 신천지라서, 맥주를 마시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좀 찍고 있으려니 갑자기 조명이 꺼지며 두번째 서포트 밴드, 벤 하퍼Ben Harper & Relentless 7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벤 하퍼는 포크 블루스에 가스펠 레게까지 섞은 듯한 음악을 하는 친구인데, 펄 잼과 함께 호주 친구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Relentless 7이라는 밴드와 투어를 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08년 벨기에에서 봤던 Ben Harper and the Innocent Criminals의 음악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만의 상징이 된 눕혀서 쓰는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하면서 벤 하퍼는 자신의 소울-가스펠끼가 가득한 음악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으나.

나는 잠이 오기 시작했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10일 동안 쉬지않고 일을 했었기 때문에, 혹시나 지쳐서 공연을 제대로 못 보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딱 그 상황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도 배불리 먹었고 거기다 맥주 두 잔을 마셔서 더욱 피곤함이 가중되고 있었다. 으읔ㅋ 앞에서는 벤 하퍼가 노래를 부르는데... 펄 잼을 망쳐서는 안될 것 같아 그냥 빈 옆 의자에 쓰러져서 자 버렸다. 어쨌든 벤 하퍼의 음악은 절대로 라이브임에도 불구하고 쓰러져서 잘 정도로 나쁜 것이 아님을 말씀 드린다. 다만 내가 피곤한 것 뿐이었다. 


 갑자기 함성소리가 크게 들리고 사방이 밝아진다. 내 잠을 깨운 놈을 조지려고 일어나 보니 벤 하퍼의 공연이 끝나 있었다. 아, 난 펄 잼 공연을 와 있었지... 너무 피곤하고 어지러워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화장실을 갔다 오고, 감자튀김과 맥주 한 잔을 더 사 먹었다. 화장실을 간 건 괜찮았으나, 감자튀김과 맥주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배를 기름과 술로 채우니 잠이 더 오기 시작한다. 바깥 통로에 서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데 스타디움 안에서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스타디움에 들어온 지 거의 4시간 만에 펄 잼의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 달려 들어가니 이제는 사람들이 빈틈 없이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좋은 밤이군요Good Evening!"
에디 베더의 인사에 사람들이 함성을 지른다. 나는 이렇게 많은 관객이 모인 콘서트는 처음 봤다. 에디 베더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곧바로 '사람들이 존나 많군요A lot of fucking people out there! 저 앞에 바다처럼 많아요, 여기 와서 행복하네요'라고 소리치고는 바로 2집의 'Elderly Woman Behind the Counter in a Small Town'으로 콘서트의 스타트를 끊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래 가사를 다 따라 부르는 것 보니, 확실히 펄 잼은 호주 사람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은 것 같다. Elderly woman behind the counter in a small town이 끝나기가 무섭게(근데 정말 곡 이름 더럽게 길다) Corduroy의 리프가 흘러 나왔고, 그 뒤를 이어 2집의 명곡 animal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숨을 돌릴 새가 없이 강렬한 리프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오니 스탠딩 석의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그 와중에도 나는 터져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졸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런 내 몸의 반응은 나조차 놀랍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펄 잼의 animal이 라이브로 나오는데 어떻게 잠이 오는 거지? 나도 스탠딩이었다면 이렇게 졸지는 않았을 텐데 스탠딩으로 가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내 자리는 3층 구석이었는데, (1)우선 펄 잼 멤버와 무대를 거의 볼 수 없었다. (2)같이 앉아 계신 분들이 다들 연세 지긋한 노인 분들이었다. 나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고 난리 깽판을 치고 싶었지만 왼쪽에는 일본인 할머니, 오른쪽에는 호주인 할아버지가 고개만 까딱 거리는데 이 세대와 나이의 갭을 어떻게 극복한다는 말인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펄 잼을 클래식 공연 보시듯 보셨다>


 Animal이후로 모르는 곡들이 나오자 잠이 밀려들기 시작했지만, 갑자기 앞에서 아는 리프가 튀어나오자 잠이 확 달아난다. 으악! Even flow!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노약자 분들께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머리를 흔들고 에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곡 중간 멤버들의 솔로가 이어졌고, 솔로가 끝나자 5만명의 관객이 다 함께 'Even flow, thoughts arrive like butterflies'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른다. 역시나 아는 곡이 나오는 게 중요한 것 같았다. Even flow의 광풍이 끝나고 동 앨범의 Oceans가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피곤에 지쳐 조금씩 졸다가 내가 아는 곡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서 최대한 곡을 따라부르고, 곡이 끝나면 다시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짓을 콘서트 내내 반복했다. 잠은 콘서트가 끝나갈 무렵 앵콜이 나올 때가 되서야 거의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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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즈 정답은 2.Go. 하지만 펄 잼은 이 곡을 해주지 않았다.


BGM_'Animal' by Pearl Jam, Melbourne 2009 live

reference : 100 Essential New Zealand Albums by Nick Bollinger. 사실 레퍼런스랄 것도 없이 공항에서 한 15분 정도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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