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전 Z" text





 대전에서 왜관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연착이 안된다면) 대략 1시간 27분 정도가 걸린다. 그러나 이미 전광판에는 13분 연착이라는 글씨가 떠있었고, 그 사이 내가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남은 30쪽을 다 읽을 것은 자명했기에, 남는 1시간 13분을 때울 책이 필요했 다.
 대전역 서점에서 <세계 대전 Z>를 집어들 때 사실 살짝 창피했다. 인정한다. 황금가지 밀리언셀러 클럽은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며 읽기에 적합한 가볍고 재미있는 미스테리/스릴러/호러 장르의 책들을 출간하는 시리즈인데, 문제는 이 책들의 디자인들이 개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저런 장르가 B급 취급을 받는다기로써니 겉표지에 대문짝만하게 Z를 (조로가 칼로 그어놓은 것 처럼) 써넣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표지 아래에 빨간색 띠로 Millionseller Club이라 써놓으니 금상첨화다. 이 시발것의 빨간색 띠가 띠지가 아니라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제발 아무도 내가 무슨 책을 사는지 보지 않길 바라며 표지를 뒤집어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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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의 소설을 즐겨 읽는데, 말그대로 지구가 개박살이 난 다음의 이야기를 그려가는 장르이다. 그 ‘개박살’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수많은 SF작가들은 핵전쟁을 즐겨 이용하였고, 핵전쟁이 일어난 수만큼 외계인이 쳐들어오고 정체 불명의 질병이 세계에 퍼졌으며, 간혹 가다가 진노한 하느님이 대홍수를 일으켜서 개박살이 나기도 한다.
 그만큼 많이 쓰이는 이야기가 좀비이야기이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만약 좀비 아포칼립스가 실제로 닥쳐왔을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약 90%의 사람들이 옆집이나 가까운 마트를 털거나, 유투브에 동영상 실시간 중계를 하거나, 혹은’와! 드디어 좀비 아포칼립스가 왔어!’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것이라는 통계를 찾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들은 내 뇌를 까먹으려고 드는 친구들과 가족들, 이쁜 여자애들을 죄책감없이 무참하게 두드려팰 수 있는 순간만 기다리는 건지도 모른다.

 <세계대전 Z>는 좀비 소설이다. 정체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퍼지고 세계적인 혼란이 일어난 20년 후를 배경으로,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모아놓은 다큐멘터리 픽션이다. 소재는 정말 상투적이기 그지 없지만 훌륭하게 짜여진 스토리와 생생한 묘사가 그 부분을 덮고도 남는다. 중국 어딘가에서 퍼지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난민, 불법 장기 매매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고, 어떻게 세계가 개박살이 나는지를 바로 옆에서 취재하듯 박진감 넘치게 전달하고 있다. 단순히 일인칭 시점에서 좀비에 대응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화자를 통해 좀비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양하게 조명한다. 파키스탄과 이란 사이에는 핵전쟁이 일어나고 이스라엘과 중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난다. 러시아는 다시 신권국가로 바뀐다. 이런 다양한 예측들은 세계 정치와 지리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아니라면 나오기 힘들테다.
 거기에 더하여 이 책에서는 대재앙 후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자신을 좀비와 동일시하는 또라이들이나, 대재앙 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을 PTSD와 비슷한 개념의 증후군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세한 인터뷰를 한 150쪽 넘게 읽고 있으면 이제는 더이상 이 책이 상투적인 좀비 호러물로 들리지 않는다. 곧장이라도 좀비 대재앙이 시작될 것 같은 박진감이 뚝뚝 떨어진다. 좀비를 총으로 쏴 죽이는 이야기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도 오락실에서도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책이 500쪽이 넘었음에도 결국 새벽 3시까지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구린 커버를 상쇄할만한 좋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아, 헐리우드에서는 지금 이 책을 영화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원작처럼 재미있게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는 이미 말도 못할 정도로 구렸던 해리포터 영화를 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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