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직업> 2012 DN

저희를 긍휼히 여기사 / 높으신 분의 부름 있을지니


4년의 대학 생활을 꼬박 기숙사에서 보낸 나에게는 자취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이미 자취 중인 친구들은 그 환상, 딱 2주가 지나면 깨진다고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이번 겨울 구하게 된 일 덕분에 나는 반년간 서울에서 살게 되었고, 자취 중인 친구에게 내 한 몸을 의탁하게 되면서 내 환상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의 서울 상경기로 이어져야 될 것 같은 이 이야기는 곧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펙타클하게 전개되는데, 그 발단은 대청소였다. 같이 살기로 한 친구의 방은 책상에서 기지개를 켜면 냉장고에 손이 닿을 정도로 좁았다. 좁았기 때문에 화장실은 오히려 안전했는데, 왜냐하면 미끄러 넘어져도 좁아서 넘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좁은 곳에서는 인간의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른 나는 친구에게 대청소를 선언했다. 그러자 친구는 이 것부터 치워야 한다며 냉장고에서 상한 반찬 네 통을 꺼냈다. 잠시간 말문을 잃은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쌓여있는 짐을 치우기 시작했고, 친구는 말없이 상한 반찬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처리 방법이 문제였다. 쓰레기 봉투가 없어서 우리는 상한 반찬을 화장실 변기에 쳐넣었고, 다른 상한 반찬을 세 통이나 소화한 변기는 결국 마지막 통에 들어있던 총각김치를 버티지 못한 채 막히고 만 것이다. 반찬들을 상할 때 까지 냉장고에 쳐넣어둔 친구도 친구지만, 10센치가 넘을 총각김치를 그냥 변기에 버리자고 주장한 내 책임도 컸다.
원룸 관리인을 부르면 일은 쉽게 해결될 테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처리 방식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politically correct' 않았다. 하지 말라는 짓을 꼭 해서 욕을 먹는 사람이 있다더니 그게 우리였고 우리는 집주인의 욕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날밤 나는 주인에게 혼나는 내 모습과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젓는 배관공, 살인사건 현장처럼 노란 테이프가 붙여진 우리의 화장실을 상상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꿈에는 총각김치가 나왔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나왔다.
죽음을 선고 받은 환자는 차례로 다섯 가지 패턴의 행동을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변기를 막아버린 우리가 그랬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밤이 지나고 아침에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속을 비울 수 없다는 절망이었고, 우리가 택한 방법은 현실 도피였다. 이른 아침부터 우리는 반경 100미터 이내의 큰 건물들을 필사적으로 수색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서한방병원 1층 본관과 별관, 브라운스톤 오피스텔 1층의 화장실을 찾아내었다. 그 이후의 일과는 이랬다; 새벽에 잠이 든다 -> 아침 9시에 눈이 떠진다 -> 츄리닝을 입고 달려나간다 -> 이른 아침부터 콜록거리며 동서한방병원에 모여 계시는 어르신을 헤치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 아아아! -> 돌아와서 남은 잠을 잔다.
우리는 이 짓을 자그마치 5일 넘게 했다. 나는 서울에 올라오고 얼마 되지 않아 바빴으니, 일찍 변기를 뚫지 않은 책임은 게을러 빠진 내 친구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변기가 막히고 일주일 되던 날,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자취 하면 뭐해? 당장 싸질 못하는데!” 그리고 우리의 '위생적으로 올바른sanitarily correct' 환경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 뚫어뻥과 (배관공들이 쓴다는) 분쇄기를 사서 돌아왔다.
한 시간여에 걸친 야간발파작업 끝에 변기는 일주일간의 변비를 멈추고 시원하게 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기쁜 나머지 노래(빌리지 피플의 Y.M.C.A.)를 틀은 다음 서로 얼싸안고 춤을 췄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특별히 김을 두 통이나 뜯었다고 하면은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가실거다!
그렇게 밥을 먹으며 우리는 배관공이라는 직업의 고귀함과 매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저녁을 다 먹은 이후에는 '슈퍼 마리오(Super Mario Bros.)'를 보면서 우리의 승리를 자축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영화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영화이며,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평단의 대대적인 찬사가("게임의 영화화: 어두운 실패의 역사?") 영화의 품질을 보증하고 있었다. 혹시나 왜 게임 역사상 최고 캐릭터의 직업이 배관공인지 궁금하신 분이 계시다면, '슈퍼 마리오'를 꼭 보기를 추천한다. 보고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아니 나도 봤는데, 진짜 재밌다니까. 오죽하면 내가 일주일만에 막힌 변기를 뚫었겠어. 

대학내일 597호(2012. 2. 27 ~ 2012. 3. 4)에 실림.
링크는 여기.



*이미 내 블로그에서 몇번 다루었던 내용을 결국 이렇게 잡지에 실었음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변기에 집착하다니 나도 무슨 변기 페티쉬 아닌가 걱정이 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이런 글을 실어주다니 대학내일 편집부한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사실 분량 문제로 대학내일에 실린 글은 많은 부분이 잘렸는데, 내 블로그에는 원본을 올린다. 아 황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래 제목은 "아! 이제 똥쌀수 있다!" (황윤, 2012)로 하려고 했었다 ㅋㅋㅋ

덧글

  • Flug 2012/02/28 00:40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진지함의 탈을 쓴 개그군요ㅋㅋ
  • kidsmoke 2012/02/28 01:06 #

    ㅋ ㅋ ㅋ ㅋ ㅋ ㅋ
  • 이랑 2012/02/28 15:06 # 삭제 답글

    변기 페티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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