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국제음악영화제(4) 8월 12일 일요일, 세르쥬 갱스부르와 함께 trip

"제천국제음악영화제 8월 11일 토요일, 죽어라 영화 봤음"에 이어서.

열 한시에 깼다. 깨고도 머리가 무거워 삼십분은 침대에서 굴러 다녔다. 친구와 함께 일본식 술집 가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하이파이브도 하고 사진도 찍고 제천이 원산지라는 '시원 소주' 마신 거도 기억이 나는데... 영 흐릿했다. 통증까지는 아니었지만 술 마신 다음날 찾아오는 숙취가 내 머리를 바위처럼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고, 술에 취해 잘 모르는 사람들 기숙사에 들어와서 잔 것이 부끄러워 얼른 씻고 친구와 나왔다.

세명대 기숙사 바깥으로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앗차 싶어 짐을 챙겨보니 대전에서 가져온 우산이 보이지 않는다. 등에는 배낭 왼손엔 팝콘 오른손엔 우산... 그 고생을 하며 들고 다닌 우산인데. 의림지로 영화관으로 들고 다닐 땐 한방울도 내리지 않더니 딱 잃어버리자 마자 이렇게 비가 쏟아지다니 하늘이 날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 나리는 것이 예뻐서 불평은 않고 구경만 했다. 물론 오늘도 청풍호반에서 스테이지 세팅을 해야 할 나의 자원봉사자 친구는 불평이 얼굴에 한가득이었다.
택시를 타고 제천 시내로 나왔다. 어젯밤 술에 지친 탓에 몸이 데친 배춧잎처럼 택시 문짝에 늘어졌다. 원래 계획은 영화를 한 편 정도 보고 인천으로 올라가 펜타포트에서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스를 보는 것이었으나, 이 체력과 이 날씨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서, 다섯시까지 영화를 보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우선 친구와 그저께 간 '우성순대'에서 해장을 했다. 순대국밥 안에 고기 건더기가 너무 많아 해장이 안 될 지경이었다. 참 맛있더라구요... 여러분께 추천합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열심히 먹고 나와 영화를 보러 갔다.

제천에서 본 여덟번째 영화, <파라디소 콘서트홀의 추억Paradiso, an Amsterdam Stage Affair> : 
원래 미리 표를 구해놓지 않았던 일요일 두 시 영화는 다 매진이었다. 혹시나 해서 창구에 남는 아무 표가 있냐고 물으니, <파라디소 콘서트홀의 추억>이 딱 한 장 남아 있다고 했다. 얼씨구나! 하고 표를 구매.
필름은 암스텔담의 콘서트장 'Paradiso'의 역사를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교회로 쓰이던 때부터 시작하여 히피, 펑크족들의 소굴을 거쳐 대중음악의 전설이 된 현재까지를 보여준다. 파라디소를 거쳐간 수많은 뮤지션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역시 가장 좋았다. 섹스 피스톨즈와 조이 디비전이 공연한 파라디소의 처음도 좋았지만 페이슬리스, 마사 웨인롸잇이나 패트릭 왓슨이 함께 하는 지금의 파라디소도 좋더라. 특히나 패트릭 왓슨의 라이브를 이 필름에서 볼 수 있을지는 몰랐다. 아, 데우스dEUS도 언급되서 반가웠음!
필름은 화면을 다양하게 분할하는 기법을 계속 썼다. 한 공연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거나, 여러 인터뷰를 시간차를 두고 보여주는 기법이 신선했는데, 계속 반복되니 지치더라. 밤새 먹은 술과 방금 배불리 먹은 순대국밥 덕분에 영화 후반의 반시간 동안은 잠이 들고 말았다. 영화제가 끝나고 보니 이 영화가 국제경쟁부문에서 수상했던데 다시 보고 싶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질락말락. 메가박스 앞의 거리에서는 버스킹이 열리고 있었다. '프리마베라Primavera'라는 팀이었는데 저 먼 브라질의 삼바 사운드를 멋지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카페에 가면 자주 흘러 나오는 대충 만든 듯한 본새의 보사노바 음악을 참 싫어했는데, 이 팀의 노래는 참 좋았다. 때에 따라 두세명이 함께 연주하는 폭넓은 퍼커션도 좋았고 감정이 격한 흰 옷 차림의 남자가 만드는 기타 사운드도 마음에 들었다(기타가 아니라 전통악기라고 이름을 가르쳐 줬는데 까먹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매력은 비록 '영화제'이지만 '음악'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고, 영화제 기간 동안 제천 일대에서는 어디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다양한 공연과 더불어 음악영화제의 또 하나의 명물은 매년 열리는 버스킹 컴페티션인데, 예상보다 훨씬 멋진 팀들의 공연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전날 본 작년 우승팀 '신나는섬'의 공연도 좋았고. 버스킹 컴페티션은 제천음악영화제에 참여한 버스킹 밴드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로 승자가 가려진다. 좋은 음악을 들려준 프리마베라 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표를 선사했다. 나중에 프리마베라가 우승했다고 들었다. 하하하. 다 내 덕입니다!


제천에서 본 마지막, 아홉번째 영화, <세르쥬 갱스부르의 자화상Gainsbourg by Gainsbourg> : 
그렇게 즐거운 공연을 보러 마지막 영화를 보러 영화관으로 돌아왔다. 하도 많은 영화를 보다 보니 이제 영화관에 입장하는 내 모습에서는 자못 전투적인 분위기까지 풍긴다.
제인 버킨과의 연애, 음악, '69 Année Érotique'까지  <세르쥬 갱스부르의 자화상>이야말로 내가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 중 하나였다. <Gainsbourg by Gainsbourg>라니 제목마저 위트 넘치고 매력적이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영화는 영 보기 힘들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갱스부르의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다시 한 번, 영화제목은 참 잘 지은 것 같았다). 그의 인생에 대한 좀 더 자세하고 객관적인 해설을 원했는데 갱스부르의 독백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어떤 때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붕붕 떠다녔다. 물론 그의 목소리로 듣는 그의 이야기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갱스부르가 자신의 외모에 열등감을 느꼈으며 그로 인한 여성혐오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제인 버킨 뿐만 아니라 브리지뜨 바르도와 사귀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으며(망할 놈의 새끼 도대체 몇 명의 미녀랑 사귄거야!), 그녀와 헤어지고 쓰여진 노래가 'Initials B.B.'임을 배웠다.
하지만 먹은 것이 잘못된 탓인지 영화 중간에 속이 너무 나빠졌다. 결국 영화 끝부분에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매력적인 저음의 프렌치 발음도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한시간 반동안 들으려 하니 고역이더라... 그렇게 약간 아쉬운 상태에서, 내 첫번째 제천 영화제가 끝이 났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비는 한 방울씩 내려앉아 시멘트 보도에 점점이 검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지면 청풍호반도 가보려 했건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잠시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제천에서의 여행을 여기서 마무리짓기로 했다. 대전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기차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인천에서는 곧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공연이 열리겠지.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동시에 두 가지 추억을 만들 순 없으니까.
또 한 번의 음악과 소음 대신 나는 침묵과 휴식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걷기 시작할 때만 해도 참을만 했던 비는 제천역에 도착할 즈음엔 거센 폭우로 변해 있었고, 역 앞에서 토스트 하나를 사서 입에 물고 어스름이 내리는 제천역사 바깥에 앉아 야금야금 뜯었다. 빗방울은 내가 앉은 자리에도 한 둘씩 튀었고, 나는 살짝 안으로 자리를 피해서 흐릿한 철길을 바라보았다. 해가 넘어갈 때 함께 져버리지 못한 햇빛의 잔존이,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신비한 형광의 군청색을 발했다. 그 빛은 철로와 멈춰진 차량을 비추는 나트륨등의 무심한 오렌지 빛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철로 주변의 철탑들과 전선의 실루엣이 그 빛들을 말없이 수직과 수평으로 잘게 조각내고 있었다. 
10분만 지나면 사라질 이 어스름의 광경을 나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등장인물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고, 지금 이 순간이 그림으로 묶이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멈추고 나는 끝없이 기차를 기다리겠지. 
여행 말미의 피로와 기분 좋은 고독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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