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고전 읽기의 두려움 text


고전에 관하여 내가 들은 가장 훌륭한 정의는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다. 정말 그러하다. 다들 니체를 인용하지만 <짜라투스트라...>를 읽어본 사람을 만나기 힘들고 모두가 밈meme의 파급력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사람은 드물지 않던가.

나에게도 고전은 넘기 힘든 산이다. 다들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이지만 막상 읽으려 하면 지레 겁을 먹게 된다. 철학에서, 문학에서 그렇게 중요한 책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책값은 비싸고, 대부분은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그 부분을 참고 집에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하면, 왜 한 단어도 못 알아듣겠는건지. 나의 사고력이 이정도밖에 안되는 건지, 전공자가 아니라서 당연한 건지, 무너지는 자신감과 쏟아지는 잠과 싸워가며 겨우겨우 다 읽으면 또 하나의 회의가 찾아온다. 재미있고 감동이 넘치고 교훈적이고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데, 왜 나는 그 중 하나도 느낄 수 없는거지? 아니, 난 도대체 뭘 읽은걸까? 한 번이라도 읽었으면 그나마도, 다행이지 보통은 책 앞부분만 까매진채 통독을 포기하기 십상인 것이다. 마치 당신의 <수학의 정석>처럼.

이렇게 한 권 한 권 실패의 아픔은 커져만 가고, 서울대다 카이스트다 문광부다 여러 곳에서 고전으로 뽑는 책은 많은데 나는 이들의 목록에 오른 책부터 먼저 장바구니에서 빼내는, 어느새 중증의 <고전공포증> 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뭘 몰랐던 어린 시절 이미 사버린 고전은 책꽂이에서 장식용으로 그 덧없는 수명을 세어가게 놔두고 말이다.
(당장 우리집 책꽂이만 뒤져봐도 내가 '중간고사 이후에!'라고 메모 해놓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과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가 먼지를 덮어쓰고 꽂혀 있다. 그 중간고사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 지금 6년이 지났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리아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알지만 <일리아스>를 읽어 보지는 않는다. 딱히 읽을 필요도 없다. 나도 사실 그닥 읽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호메로스의 다른 서사시인 <오뒷세이아>가 읽고 싶었는데, 1. <일리아스>가 <오뒷세이아>의 전편이며 2. 입대를 앞두고(아마도 한동안 여러분은 이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집에서 놀고 있는 나는 시간이 화수분처럼 넘쳐나고 3. 그러므로 지금이 아니면 이런 고전을 언제 접해 보겠느냐, 하는 세 가지 이유 덕분에 먼저 집어들게 된 것이다.

고전은 심지어 책을 고르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나이를 먹은 고전의 경우 여러 번역을 거친 다양한 텍스트가 존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간추린>, <요약된>, <그림과 함께 보는> 등등의 접두사가 딸린 고전이 많이 팔리는 추세이나 나는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천병희 교수의 완전판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샀다. 어쨌든 기왕 읽는 거 간지나게 읽어야지!

그리고 집에 800쪽 짜리 책 두 권이 배달되어 왔다. 무슨... <일리아스>는 본편만 700쪽에 해설만 100쪽이다. 그 해설도 주석, 주요 인명, 주요 지명, 주요 신명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순간 예전에 구입했던 다른 고전인 1324쪽짜리 <율리시스>의 악몽이 떠올랐으나 (그 책 지금 내 책상 밑 책꽂이에 구입 당시의 상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채로 꽂혀 있다) 곧 마음을 추스르고 일리아스를 집어들었다. 그래, 난 곧 호랑이 육군이 되어 나라를 지킬 신체정신 건전한 싸나에 아닌가.


<일리아스>는 잘 알려져 있듯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말 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면서 나는 내가 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트로이 전쟁 이야기의 이미지와 <일리아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지극히 작은 부분, 시간으로 따지면 50일 남짓만을 다룬다. 전쟁 자체가 10년이나 지속되었고 전쟁 전과 후에도 굵직한 신화들이 많았음에도 <일리아스>에는 나와있지 않다. <일리아스>는 전쟁의 마지막 해에 일어난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불화, 헥토르와 아킬레스의 싸움만을 다룬다. 에리스의 불화의 사과는 물론이고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트로이 전쟁'이지 <일리아스>와는 달랐던 셈이다.

그 50여일을 <일리아스>는 내가 읽은 책 기준으로 약 24권, 700쪽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지루하지 않느냐? 물론 지루한 부분도 있다. 양이 양인데다, 내가 알지도 못했던 지명과 인명이 창세기의 '누구는 누구의 아들인데 몇천년을 살았고~'처럼 마구 쏟아진다. 거기다 '서사시'라는 여간해서는 접하기 힘든 장르의 어색함이 크다. 고대 그리스어 원전에서 오랫동안 윤색된 것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니 만큼, 그 당시의 운율이나 각운은 우리가 아마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부분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아쉬운 부분은 어찌할 수 없다 치더라도 <일리아스>는 읽을 가치가 있다. 역사만 지루하게 나열하면 어쩌나 하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일리아스> 내용의 대부분은 피와 살점이 튀기는 전투의 묘사이다. 

북풍의 거센 입김에 난바다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바다의물결도 이렇듯 요란하게 육지를 향해 노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숲을 태우려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산골짜기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그 소음이 엃듯 요란하지는 않으며,
성이 나면 가장 사납게 울부짖는 바람도 잎이 높다랗게 달린
참나무 숲에서 이렇듯 요란하게 소리치지는 않는다.
그만큼 큰 소리로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은
무시무시하게 함성을 지르며 서로 마주 달려갔던 것이다.
(392쪽, 14권 394줄~401줄)

…그러한 그의 눈썹 밑
안저를 페넬레오스가 찔러 눈알을 빼버렸다. 그리하여 창이
곧장 눈을 뚫고 들어가 목덜미로 빠져나오자 그는 두 손을 내밀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페넬레오스가 날카로운 칼을 빼어 그의 목
한가운데를 내리쳐서 머리를 투구와 함께 땅에 내팽개쳤다.
아직도 그의 눈에는 강한 창이 꽂혀 있었다.
(396쪽, 14권 493줄~498줄)


사나이들의 전투를 대자연에 빗대어 묘사한 아름다운 표현은 물론, 청동 창이 턱을 가르고 혀를 찢고 눈알을 빼버리는 묘사는 충격적이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생하다. 왜 <일리아스>가 잊혀지지 않고 문학 작품으로 수천년의 수명을 이어오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저걸 읽어봐, 머리를 잘라서 땅에 떨어 뜨렸는데도 눈에 창이 꽂혀있다니, 이건 영화 <300> 보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다고.

또 재미있는 부분은 인간과 신들의 숨김없는 모습이다. 다급한 전투의 와중에도 사람들이건 신들이건 욕망을 숨기는 법이 없다. 전쟁의 중간에도 축하할 일이 있으면 경기를 열어 축하하고 포도주를 양껏 퍼마시고 잠이 든다. 신 중의 신이라는 제우스는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스인을 도왔다 트로이인을 도왔다 하다, 나중에는 아예 손을 놓고 다른 신들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이른 후 멀리서 관전한다. 신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사랑을 나누고 유혹하고 속이며, 이 모습은 인간들의 삶과 별반 다를바 없다. 아니, 인간보다도 더 복잡하고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전우의 시체와 트로이의 운명을 걸고 작당하는 신과 인간의 모습은 기천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장장 700쪽에 달하는 <일리아스>는 *스포일러* 프리아모스 노인이 헥토르의 시체를 거두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스포일러* 오랜만에 읽는 고전이었던 <일리아스>는 과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고, 내가 무의식 중에 쌓아오던 많은 오해와 편견을 없애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사시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장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생생함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과연 사람들이 왜 고전을 고전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리아스>를 다 읽고 내가 새롭게 생각해 본 고전의 정의는 이렇다. "모두가 알고 아무도 읽지 않았지만 한 번 정도는 꼭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 <일리아스>는 그런 책이다.



* 이제 <오뒷세이아> 읽을 수 있겠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덧글

  • 베뤼 2012/10/15 01:10 # 답글

    우리가 통한건가요? ㅋㅋ 저도 얼마전에 오뒷세이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걸로 읽었거든요.반갑네요 왠지~
    지루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완전 재밌게 읽었어요! 일리아스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재밌을꺼같애요 ㅎㅎ
    트랙백 남기고 갑니다^^
  • kidsmoke 2012/10/15 02:24 #

    저는 이제 오뒷세이아 읽을랍니다 ㅋㅋㅋㅋ
  • 아루아루 2012/10/17 16:14 # 답글

    그렇군요 저도 저 일리아스 읽고 잇는데
    어서 끝내고 오뒷세이아 읽고 싶네요. 전 지금 한 500페이지 정도?
    생각보다는 은근 한번 빠지면 읽기 괜찮았어요
    신과 인간들의 밀당도 있고 신들 사이에서의 감정 싸움이라든지
    묘사도 괜찮고. 그나저나 이렇게 읽기도 힘든 두꺼운 책을 쓴다는 건.....
    뭘까요 하악

    오뒷세이아가 더 괜찮다고 하니 저도 이거 마무리하고 읽고 싶습네다. 흐흐
  • kidsmoke 2012/10/17 16:48 #

    한 번 몰입되면 잘 읽히게 되는 것 같아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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