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매들레이드(1) 멀고 먼 애들레이드, 축제의 도시에서 - 0910 with guitar



"우리 중에 첩자가 있어!"


“잉? 월요일을 안본다고요?”
출발 전날 밤, 백패커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유키는 ‘이 사람 붕어빵에서 팥만 빼고 먹네’하는 표정으로-정말로 놀랍다는 듯이-그렇게 되물었다. 아니, 기간이 4일이나 되는데 꼭 다 갈 필요 있어요? 우리는 금-토-일 3일 티켓을 이미 샀는데?
“월요일에 라비 샹카Ravi Shankar의 공연이 있어요. 안 보면 정말 후회 할 걸요. 꼭 봐야되요, 이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 유명한 사람 맞는데...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 봤는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인도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바로 떠오르질 않으니 굴욕적이다. 그의 강력한 추천에 못이겨 나는 월요일 공연도 고려해보겠다고 말했고, 곧 서로 여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키는 일본과 호주를 오가면서 뮤지션과 NGO활동을 병행하는 친구였다. 멜번은 친구의 공연을 보기 위해 잠시 들렀다면서 아이팟으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맑은 톤의 몽환적인 기타음이 6분 내도록 흘러나온다. 기타만 이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적으로 녹음했다고 한다. 명상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각보다 괜찮아서 나중에 찾아 들어보겠다고 하고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저도 워메들레이드 갈건데, 그 때 얼굴이나 봐요. 이 말을 남기고 유키는 멜번에 사는 친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나는 룸메이트인 영국에서 온 여자애 두 명과 함께 방에 남았다. 노래를 해달라는 말에 윌코를 쳐주며(아냐, 'I'm yours' 쳐달라는 말은 하지마 샌디, 난 제이슨 므라즈가 싫단 말야!) 멜번의 마지막 날 밤을 보냈다. 호바트에서 돌아와 겨우 하루를 지내고 떠나게 되는 것이다. 새벽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지만 마지막 날 밤이라 그런지 잠이 올리가 만무하다. 결국 새벽이 늦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마터면 나와 여자친구는 다음날 아침 기차를 놓칠 뻔 했다. 우리는 서로 숨을 몰아쉬며 짐이 한가득인 캐리어를 끌고 기타와 배낭을 메고 서던 크로스Southern Cross역에 도착했다. 우리를 애들레이드로 데리고 갈 오버랜드Overland 기차가 마침 출발전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공기가 주 교통 수단이 되기 이전 시절 열차는 호주 대륙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도시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드넓은 땅의 넓이만큼 호주에는 많은 특별 열차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열차는 시드니부터 퍼스Perth까지,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인디언 패시픽Indian Pacific일 것이다. 인디언 패시픽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대륙 횡단 열차이며 또한 478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선 코스를 통과하기도 한다. 와... 478km가 직선이라니... 우와... 내 키도 직선으로 1.70m가 되느냐 마느냐인데.... 이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스케일이다.
어쨌든 호주에는 인디언 패시픽을 비롯하여 남북을 연결하는 간The Ghan 등 전국을 연결하는 여러 특급열차들이 있는데, 오버랜드는 그 중 특급 열차 중에서는 비교적 짧은 거리인 멜번과 애들레이드 사이의 828킬로미터를 이어주는 열차이다. 물론 저가 항공이 더 편하고 가격도 싸지만 둘 다 한번 정도는 기차 여행의 낭만을 느껴보고 싶었기에, 멜번과 애들레이드를 이어 주는 특별 열차인 오버랜드Overland를 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낭만은 개뿔. 기차 여행의 낭만을 느끼기에 열 한 시간은 너무 길었다. 이미 시드니로 버스 여행을 할 때 스키니진과의 사투를 벌이며 겪었던 일인데, 기차면 좀 다를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의자는 좁고 짐은 많아서 우리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기 힘들었고, 기차는 특별 열차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진동과 소음이 너무 심했다. 거기다 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는 전면이 꽉 막혀있는 객차 맨 앞 자리에 앉아야 했다. 목을 고통스레 옆으로 완전히 뒤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열 한 시간 내도록 멍청한 회색 벽만 바라보고 가야 했다.
물론 호주 기차 여행은 한번 정도는 충분히 해 볼 가치가 있다. 멜번과 애들레이드 지역의 맥주를 마시며(Coopers, 호주) 끝없는 사막을 끝없이 내다보는 경험은 호주 기차가 아니면 하기 힘들지 않을까. 중간중간 기차는 다 스러져가는 판잣집 몇 채가 서 있는 촌 마을에 정차하고는 한다. 까만피부에 맨발의 어보리진들이 보인다.
건조한 관목지대 사이로 캥거루가 보일까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기차가 건조한 황무지로 들어서자 마른 먼지가 일어나더니 시야를 가려버렸다. 그나마 지루한 황무지도 구경할 수 없었고, 입에서는 텁텁한 먼지맛이 난다. 냉방도 잘 안된다. 맥주를 마시는 이유도 그 덕분이다. 도저히 제 정신으로는 열 한 시간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탈진할 때 즈음 되어 기차는 애들레이드에 도착한다. 분명히 도착 시간인데, 밖으로는 아무리 봐도 건조한 초원과 나무만 보였다.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이게 설마 애들레이드일까? 하고 여자친구와 농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열차가 멈추고 모든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촌동네가 애들레이드라니?
실은 기차역이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서자 넓고 시원한 도로와 잘 정돈된 정원이 나타난다. 블록 하나하나가 네모 반듯하게 정리 되어 있다. 계획 도시 애들레이드의 깔끔한 첫인상이였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번호판도 Victoria에서 SA(South Australia)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주에 온 것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호주에서는 주에 따라 자동차에 다른 종류의 번호판이 주어지는데, ‘Victoria: The Place to be’나 ’Tasmania: Holiday Isle’처럼 주마다 각자의 구호를 가지고 있다. 애들레이드가 있는 여기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주의 구호는 ‘SA: The Festival State’이다. 축제의 주라는 뜻인데 과연 그 구호에 걸맞게 애들레이드에서는 기타 페스티벌, 작가 페스티벌 등 일년 내내 다양한 종류의 축제가 열린다. 우리가 애들레이드에 도착한 3월 초 무렵에는 호주의 수많은 예술 축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애들레이드 페스티벌Adelaide Festival of Arts’이 한창이었다. 널찍한 대로와 건물 사이사이에 이번 페스티벌의 마스코트 중 하나인 핑크색 튜튜를 입은 우주비행사들이 서 있거나 빌딩 외벽에 달라붙어 있다.
우리는 즐거운 페스티벌을 기대하며 우주비행사들의 사진을 찍었다. 기차여행의 피로는 어느덧 씻겨나가고,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축제에 대한 기대가 마음을 채운다.

다음날 우리는 느지막히 일어나 애들레이드 시장을 거닐며 장을 보았다. 음식들을 마음껏 사먹을 만한 충분한 돈은 없었지만 포도부터 커피, 요구르트까지 다양한 먹거리들을 시식하며 시장을 구경하니 벌써 배가 부르다.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을 소개하는 소책자들이 시장 구석구석에 널려 있어서, 다리도 쉴 겸 앉아서 가게에서 사온 신선한 요구르트를 퍼먹으며 스케쥴을 훑어 보았다.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은 1960년에 시작하여 올해로 벌써 50년을 맞는 장수 축제다.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애들레이드 전역에서 오페라와 연극, 춤과 다양한 음악을 포함하여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올해의 경우 리게티의 오페라 대종말Le Grand Macabre의 호주 초연이 있고, 런던 신포니에타London Sinfonietta가 아담스와 케이지의 작품을 공연할 계획이다. 보로딘 쿼텟Borodin Quartet이 쇼스타코비치의 사중주를 연주한 다음 날에는 같은 장소에서 웨인 쇼터 쿼텟Wayne Shorter Quartet의 콘서트가 있으며, 축제 마지막날에는 무려 두 관현악단과 합창단이 함께하는 말러의 장대한 8번 교향곡 콘서트가 열린다. 음악 프로그램만 해도 이 정도다.
하지만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페스티벌과 함께 열리는 수많은 부대 행사 때문이다. 에딘버러 페스티벌 다음으로 크다고 평가받는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Adelaide Fringe Festival, 세계 최대의 문학 축제인 애들레이드 작가 주간Adelaide Writer's Week도 애들레이드 페스티벌과 함께 열린다.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즐기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는 것이다.애들레이드 작가 주간의 스케쥴표를 훑어보다, 좋아하는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바로 어제가 강연 날이었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멜번에서 제이미 올리버의 라이브 요리쑈를 놓친 것 만큼 안타까웠다.

이 수많은 행사와 축제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은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월드 뮤직 페스티벌, 워매들레이드WOMADelaide였다.
워매들레이드는 세계적인 월드 뮤직 페스티벌 워매드WOMAD와 애들레이드의 합성어로, 1992년부터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리기 시작한 월드 뮤직 페스티벌이다. 지금은 남반구에서 가장 큰 월드 뮤직 페스티벌이 된 워매들레이드는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에서도 하이라이트 시즌인 3월 초순의 나흘간 열리게 된다. 이름이 입에 잘 감기도록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워매들레이드가 열리는 보타닉 파크Botanic Park로 걸어가면서 여자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름이 솔직히 쩔잖어. 워-워매-들레이드 혀에 얼마나 잘 감겨? 재즈 페스티벌 째들레이드(?)나 락 페스티벌 롸들레이드(?)였다면 솔직히 이정도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거야. 밴드나 페스티벌이나 역시 이름 잘 짓는게 중요한 것 같어. 여자친구는 이런 신빙성 있는 헛소리를 잘도 들어준다. 내가 참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런 헛소리를 하면서 걷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우리가 가야하는 애들레이드 보타닉 파크는 애들레이드 보타닉 가든 북쪽에 있었는데, 아니 어쩌자고 비슷한 이름의 장소를 한 군데에 붙여 놓은걸까? 공원 한복판에서 지도를 보면서 한참동안 길을 헤맸다. 하지만 공원이 아름답게 잘 조성되어 있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그만 강에는 흑조들이 헤엄을 치고 있고, 열대 식물들 사이로 초록과 파랑이 섞인 앵무새들이 날아다닌다. 
귀여운 오리 가족 표지판이 서 있는 길을 건너자 마침내 워매들레이드 공연장 입구가 나타났다. 애들레이드 페스티벌 50주년을 기념해 올해의 워매들레이드는 사흘이 아닌 나흘 동안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인터넷으로 3일 티켓을 샀던 우리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 결국 유키의 말을 믿고 가지고 있던 티켓을 4일 티켓으로 바꾸었다. 자, 새로운 축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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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음악, "Ere Mela Mela", Mahmoud Ahmed (Ethiopi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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