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메들레이드(5) 축제의 끝, 이별의 시작 - 0910 with guitar


그리고 이별이 찾아왔다.

워메들레이드가 끝나고도 우리는 일주일을 애들레이드에서 보냈다. 나흘 동안의 축제로 완전히 탈진한 나는 워메들레이드 다음 날에는 한참동안 늦잠을 잤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여자친구가 맥주를 사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물어보니 내 생일 선물이라고 했다. 아,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페스티벌 기념품들을 둘러보며 생일 선물을 돌라고 조르던 나였는데 나는 내 생일도 깜빡하고 있었다.
그녀의 선물은 워메들레이드에서 사온 원기둥 모양의 셰이커와 이 곳 애들레이드에서만 나는 두 가지 종류의 맥주(Knappstein Clare Valley Reserved Lager와 Red Angus Pilsner, 애들레이드)였다. 특히나 냅스타인 어쩌구 저쩌구 하는 긴 이름의 맥주는 와인 양조장에서 만들어져 포도향이 나는 특이한 맥주였다. 맥주 라벨을 모으는 나를 위한 멋진 선물이었다.

깜짝 선물과 함께 더할나위없이 멋진 생일을 보냈지만, 한편으로 나는 불안했다. 애들레이드에서의 이 한 주를 끝으로 우리의 일정은 갈리게 된다. 우리가 사귀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고 이 갈림길을 알고 그녀를 만났으니 헤어질 때도 별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자 몸과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하는 시간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고, 태즈메이니아 여행 때 서로 다투기도 했지만 둘이서 하는 여행에 적응이 된 지금,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은 더욱 싫었다. 생각같아선 기타도 페스티벌도 다 때려 치우고 여자친구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안될 건 어딨어? 줏대 없이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골치가 아파지면 숙소 앞 공원에 나가서 기타를 치면서 머리를 식혔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다. 워메들레이드가 끝난 뒤에도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은 아직 많은 일정이 남아있었고, 우리는 동네 여러 곳에서 열리는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의 서커스와 공연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게 될까. 썩 괜찮아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폭탄을 돌리는 나날이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여자친구였다. 가벼운 산책을 다녀왔던 일요일 저녁, 그녀는 아무래도 헤어져야 하겠다고 말했다. 곧 듣게 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뭐라구, 잠시만, 무의식적으로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고 안돼, 한번만, 이라는 단어들이 입속에서 나오려고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애들레이드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나는 알겠다고, 동의의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였지만 더 이상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서로의 앞에는 각자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의 이야기를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지금 헤어지면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있어야 만날 수 있을 거고,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의 반년간 만나기는 커녕 서로 연락조차 할 수 없을텐데. 결국 우리는 애들레이드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하려 했던 만큼 나는 비겁했고, 관계의 진전도 끝도 보고 싶지 않아 대답을 회피해 왔던 것이다. 이제는 따로 갈 시간이다. 여자친구는 겁쟁이였던 내게 현실을 말해 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백패커즈에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여행을 한 소감과 좋았던 여행지를 꼽아보았고, 서로의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함께 지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공유하였고, 그와 동시에 아직도 서로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같이 여행을 하고 매일 밥과 말을 나누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왜 진작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매일 실없는 농담만 한건지, 깨달음은 언제나 후회보다 한발 늦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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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레이드의 마지막 날에는 해변에 갔다. "인간극장"도 항상 마지막 편에서는 바다로 가니, 우리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기타도 챙겼다. 해변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이별의 아쉬움과 씁쓸함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때까지도 잔뜩 삐져 있었다. 내가 해야할 말을 대신 해 준 고마움도 모르고, 트램을 타고 바닷가에 가는 30분 동안 나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고, 아이팟으로 ELO의 <미드나잇 블루Midnight Blue>만 반복해서 들었다.
마침내 도착한 부두에서는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고, 어린애들은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었다. 거친 대륙 호주는 바다마저 거칠었다. 햇볕은 정말로 따가워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고, 바다는 맑았지만 수영복이 없어서 발만 담굴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반시간도 채 보내지 못하고 트램 정거장 앞의 공원으로 돌아왔다.
낙담한 기분으로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뭘 먹어서 속을 채우거나 아니면 노랠 불러서 속을 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뭔가 사먹기에는 돈이 없었고, 그래서 대신 막힌 속을 비우기로 했다. 사실은 노래 부르고 싶었다. 옹졸함부터 씁쓸함에 이르는 뱃속에 쌓여있는 모든 감정을 비워버리고 싶었다.
기타를 꺼내들고 고장난 기타 케이스를 앞에 펼쳐놓고 카포를 끼우고 코드를 잡기 시작했다. 스트링을 울리자 공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 보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하릴없이 코드만 잡다가 부끄러움에 그냥 기타를 내려놓고 싶어지는 그 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I am american aquarium drinker, I assassin down the avanue..

내가 좋아하는 윌코의 <I am trying to break your heart>의 첫소절을 입에 올렸다. 그 때의 기억이 더 괜찮은 방향으로 희석된 건지 실제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래를 시작하니 갑자기 내 주위의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세상이 멈춰버렸다. 주변은 그대로였지만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나와 기타만 남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커진다. 사람들이 돌아보고 비둘기가 날아가고 맥도날드 가게에서 내 목소리가 반향되는 것이 들린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30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일곱곡을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마칠 즈음에는 목이 벌써 나가 있었고, 물이 마시고 싶었다. 긴장해서 별 기억도 나지 않는데,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던 첫번째 버스킹을 해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타 케이스를 확인하니 동전이 꽤나 들어 있었다. 그녀가 넣은 돈까지 합해서 총 11.35불, 한 만천원 정도 됬다. 버스킹으로 내가 처음 번 돈이다.

시급이 22불이면 왠만한 알바보다 쎄잖아? 이렇게 농담을 하며 그녀와 함께 피시 앤 칩스를 사먹었다. 느끼하기만 한 생선 튀김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너는 내 첫번째 공연의 첫번째 관객이니깐, 나중에 한국에서 다시 연주를 보게 된다면 감회가 남다를 거야. 그 사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을 걸.”
"근데 하나도 안 변하는 거 아냐? 틀린 데서 또 틀리고."
그녀와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내 기분이 완전히 풀린 것을 느꼈다. 30분만에 망할 놈의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실 바뀐 것은 나 뿐이었지만. 따갑던 햇볕은 이제 충분히 부드러워졌고, 적당한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는 트램을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시내에서는 비록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길 너머로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다. 원래 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을 보려고 바다로 갔던 거였는데! 늦게서야 원래의 목적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바다로 떨어지는 석양보다 더 괜찮은 것을 찾아 왔으니까. 아쉬웠던 감정은 사라지고 다시 한번 혼자서 하게 될 여행에 대한 기대가 가슴 속을 차오른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와 온전히 멋진 석양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애들레이드에서 헤어졌다. 호주를 한 바퀴 돌 예정인 그녀는 여기서 기차를 타고 호주 서부의 퍼스Perth로 갈 것이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북쪽으로 가서 호주의 배꼽에 있는 사막도시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로 간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의 여행이 별 탈 없이 끝나기를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 한 번씩을 안아주었다. 그녀를 태운 차가 가버렸고, 나는 한동안 백패커즈 앞에서 멍하니 가버리는 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치 코맥 매카시의 소설처럼, 그녀가 탄 버스가 사라진 도로 위에는 작열하는 햇빛만 가득했고 먼지 섞인 뜨거운 바람이 훅훅 내 얼굴로 불어왔다. 나는 입 옆으로 흐르는 땀을 삼켜가면서 한동안 도로를 더 바라보다가 내 짐을 가지고 나왔다. 내 갈 길이 멀다. 앞으로는 힘들 때 크게 노래하겠다. 노래 하고 싶을 때 크게 노래 하겠다, 하고 생각했다.


첫번째 버스킹, 2010년 3월 15일

1. I am trying to break your heart (wilco)
2. I'm the man who loves you (wilco)
3. A Shot in the arm (wilco)
4. Heavy Metal Drummer (wilco)
5. 일어나 (김광석)
6. Volcano (Damien Rice)
7. the Rip (Portis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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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음악, "Midnight Blue", Electric Light Orchestra

I see the lonely road that leads so far away,
I see the distant lights that left behind the day
But what I see is so much more than I can say
And I see you midnight blue.

I see you cryin now youve found a lot of pain,
And what youre searchin for can never be the same,
But whats the difference cos they say whats in a name.
And I see you midnight blue.

Chorus

I will love you tonight,and I will stay
By your side,lovin you,Im feelin midnight blue.

I see you standing there far out along the way,
I want to touch you but the night becomes the day,
I count the words that I am never gonna say
And I see you midnight blue.

Repeat chorus

Cant you feel the love that Im offering you,
Cant you see how its meant to be,
Cant you hear the words that Im saying to you,
Cant you believe like I believe,
Its only one and one its true
Still I see you midnight blue.

I see beautiful days and I feel beautiful ways
Of loving you,everythings midnight blue.

Repeat ch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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